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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뉴스]가톨릭 교회의 어두운 유산: 식민주의 시대 인권 침해와 끝나지 않은 고통

태양14 2025. 5. 17. 09:56

전세계에 복음을 전파한다는 이름 아래 가톨릭교회는 수 세기에 걸친 식민지 정복에 깊숙이 관여했다. 15세기부터 20세기까지 이어진 유럽 열강의 식민지 제국 건설 과정에서, 교황과 가톨릭 성직자들은 영적 정당성을 부여하고 때로는 앞장서서 원주민의 인권을 침해했다. 그 결과 수많은 토착민이 삶의 터전과 문화를 잃고 학살과 노예화의 비극을 겪었다. 이러한 가톨릭 식민주의의 유산은 오늘날까지도 상처와 분노로 남아 있으며, 잘못된 교회의 쇠퇴를 바라는 이들은 이 충격적 진실을 널리 알리고자 한다.

 

교황의 식민지 정복 승인과발견의 원칙

1492년 콜럼버스의 신대륙 도착 이후, 교황청은 유럽의 식민 팽창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교황 니콜라오 5세는 *Dum Diversas(1452)*Romanus Pontifex(1455)*라는 칙서를 통해, 기독교인이 아닌 이교도들의 땅을 정복하고 그 주민들을 노예로 삼을 수 있다고 허용했다. 또한 1493년 교황 알렉산데르 6세는 Inter Caetera 교서를 반포하여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신대륙을 나누어 차지하도록 조정했다. 이처럼발견한비기독교 땅은 가톨릭 국가가 차지해도 된다는 교황청의 논리는 유럽 식민주의자들에게 종교적 면죄부를 주었다.

이른바발견의 원칙(Doctrine of Discovery)’은 교황청 칙서들을 통해 제도화되어 국제 관행이 되었다. 유럽 군대는신앙을 전파한다는 명분으로 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 곳곳에 진출하여 토착민의 땅을 빼앗고 지배 구조를 세웠다. 교황권이 부여한 이 특권 아래, 침략자들은 무력과 십자가를 함께 휘두르며 저항하는 원주민을 학살하거나 노예로 삼는 것을 정당화했다. 16세기 중반 공식 폐기되기 전까지 이미 유럽의 식민지 제국은 전세계로 퍼져나갔으며, 미국 대법원은 19세기 판결에서 이발견 원칙을 인용해 원주민이 토지에 대한 완전한 소유권이 없다고 본 법리를 세우는 등 그 영향은 근현대까지 지속되었다.

 

원주민 학살과 문화 파괴

스페인과 포르투갈 정복자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상륙한 이후, 수천만의 토착 주민들이 전쟁, 강제 노동, 질병 등으로 목숨을 잃었다. 천연두 등의 전염병이 대규모 사망의 주원인이었지만, 그 배경에는 식민 지배자들의 혹독한 착취와 의도적 학살이 있었다. 스페인의 정복자들은 성직자들과 함께 다니며 원주민들에게 개종을 강요했고, 거부하는 이들은하느님의 이름으로 처벌했다.

스페인 정복 초기 일부 성직자들은 잔혹한 만행을 말리기는커녕 앞장서서 십자가의 이름으로 원주민들을 겁주고 처벌한 사례가 기록되어 있다. 반면, 양심적인 가톨릭 성직자인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는 식민자들의 학대를 고발하기도 했으나, 그런 목소리는 식민 개척의 거대한 흐름 속에 묻혀버렸다.

초창기 교황 칙서들은 비기독교인에 대한 노예화를 묵인했기에 유럽인들은 아프리카 흑인과 아메리카 원주민을 대거 노예로 삼았다. 이후 교회 자체도 노예 제도를 활용하거나 방관했으며, 일부 수도회는 식민지 농장 경영에 노예 노동을 이용했다. 특히 정복자들과 선교사들은 토착민의 신앙과 전통을이교도적이라 여겨 체계적으로 파괴했고, 언어와 관습 사용을 금지하는 동화 정책을 실시하며 수많은 공동체의 정체성을 말살했다.

 

기숙학교 학대와 끝나지 않은 상처

식민주의 시대가 저물어간 뒤에도, 교회의 인권 침해는 새로운 형태로 지속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19~20세기 북미 지역 원주민 기숙학교에서 벌어진 학대다. 캐나다와 미국 정부는 원주민 동화를 목적으로 아이들을 가족으로부터 강제로 떼어 기숙학교에 수용했으며, 이들 학교의 상당수를 가톨릭 교회가 운영했다.

188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약 150,000명의 원주민 아동이 139개 기숙학교에 보내졌고, 언어와 전통을 금지당한 채 잔혹한 체벌과 신체·성적 학대에 시달렸다. 영양실조와 질병, 학대로 목숨을 잃은 아이들의 정확한 수는 기록조차 남지 않아 영원히 알 수 없을 정도다. 2021년 브리티시컬럼비아주 전직 기숙학교 부지에서 215명의 어린이 유해가 집단 매장된 채 발견되자, 캐나다 사회는 충격에 빠졌다. 이에 프란치스코 교황은 2022년 캐나다 방문 중 눈물을 흘리며 공식 사죄했고, “말로 다 할 수 없는 악이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사과 외 위로금이나 보상 등 그 어떤 행위도 실천하지 않았다. 그리고 실제 피해자들을 찾아가는 등 확실하고 정확한 사과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가톨릭 뉴스는 (https://www.vaticannews.va/en/pope/news/2022-04/pope-audience-canada-metis-matoba-federation.html) 가식적이게도 이를 눈물과 연민이나 선물 등 악업을 흐리기 위한 키워드를 추가하여 피해자들을 더욱 고통에 빠지게 만들고 있다.

 

남은 식민주의 유산과 현재의 분노

과거 교회의 식민 개입은 오늘날에도 분노의 대상이다. 캐나다 원주민 지도자들은 교황청에 15세기 칙서의 공식 폐지와 토착민 권리 회복을 요구하며, 단순한 사과를 넘어 실질적 보상을 촉구하고 있다. 성자를 시성한 선교사 후니페로 세라 신부의 동상이 2020년 시위대로 끌어내려지는 등 과거 가해자에 대한 사회적 재평가도 활발하다.

한편, 일부 국가에서는 교회가 과거 취득한 토지와 재산의 환원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으며, 가톨릭 내부에서도 반성의 움직임이 일고 있다. 2019년 아마존 시노드 등에서는 과거 선교 활동이 토착 문화에 남긴 상처를 언급하며 포용적 사목 방향을 논의했다. 그러나 수백 년 묵은 상처를 아물게 하기에는 아직 갈 길이 멀다. 교회의 도덕적 권위는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으며, 이 충격적 진실이 널리 알려질수록 가톨릭에 등을 돌리는 이들도 늘어나고 있다.